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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평론-4th Solo Ex) Coin Invasion - 이문정(조형예술학) 2188

낯선 가능성들의 접경지대 (최종본)

이문정(조형예술학)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들을 배경으로 확대된 동전과 신문이 오버랩(overlap)되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물리적 시공간의 제약이나 사회적 · 개인적 상황으로 인해 만나는 것이 불가능했던 인물들과 사건들이 서로를 마주한다. 기념비처럼 확대된 동전, 양립할 수 없는 존재들의 만남, 중력이 사라진 것 같은 공간은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의 전형(典型)을 보여주며 우리를 압도한다. 지호준이 &<코인 인베이젼 Coin Invasion&> 연작에서 만들어내는 이 낯선 세계 안에는 미시(微視)와 거시(巨視), 창조와 파괴, 통일과 분열, 미래와 전통, 탈식민주의와 극우주의, 평화주의와 테러리즘(terrorism)처럼 상반된 현상과 가치들이 교차한다. 조화와 충돌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 접경지대(borderland)에서 인간의 역사는 새롭게 직조된다.

 

 지호준은 &<나노그래피 Nanography&> 연작에서부터 접경지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작가는 물체를 전자 현미경으로 나노미터(nm) 단위까지 확대 촬영하여 얻은 이미지를 컴퓨터로 편집 ․ 채색한 후 실제 공간에 영사(映寫)하여 재촬영했다. 홀로그램(hologram) 혹은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을 연상시키는 결과물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인간의 독립적인 지각 능력으로는 볼 수 없는 나노 입자가 자연 풍경처럼 재현되는 상황은 하이 테크놀로지(high technology)와 아날로그(analog)적 감성의 교차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호준이 확대된 나노 입자를 통해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지(認知)하는 사실(事實)과 실재(實在)의 본질을 탐구하며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대한 확신과 불신을 동시에 담아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나노그래피&> 연작에서부터 &<코인 인베이전&> 연작에 이르기까지 지호준의 작업을 아우르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다.

 

 지호준은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식하지 않은 채 인간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표현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작가는 ‘과연 인간이 보는 것이 사실인가?, 우리가 만나는 이미지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지하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믿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지호준은 인간중심적 사고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경계(border)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여주기 위해 근대적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과학 기술을 역이용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과학 기술을 통해 확장된 눈인 현미경을 발명했고 나노 크기의 미시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시각과 사고의 확장이 일어난 것이다. 나노 입자로 만들어진 세계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불완전성과 시각적 고정관념에 대한 반성인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함의하는 패러독스(paradox)를 이끌어낸다.

 

 &<코인 인베이전&> 연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인공은 나노미터, 마이크로미터(µm)로 확대된 동전이다. 현실 속 동전은 자본주의 경제를 상징하는 것이자 인간의 삶에서 필수적인 화폐 중 하나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미미한 경제적 가치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동전을 쉽게 소비하며 그것의 외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동전에는 그것이 발행된 국가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역사적 인물, 건축물, 문화재와 같은- 상징물이 새겨져 있다. 소소해 보이는 동전이지만 거기에는 인류 문명의 역사가 담겨 있다. 또한 동전은 그 액수와 상관없이 자본주의 경제 활동을 대표하는 물건이다. 현대 문명 사회에서 화폐가 상징하는 자본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며 세상 곳곳에서 인간사(人間事)에 관여한다. 동전은 가장 구체적으로 인간 사회와 역사를 보여주는 물건인 것이다.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미시 세계를 통해 인본주의를 되돌아보고 절대적 가치 기준을 허무는 지호준이 일상 속 소소한 대상이지만 묵직한 존재감을 가진 동전을 기념비적 존재로 확대하여 그 안에 담긴 본질을 재확인시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번 연작에서 지호준이 보여주는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나노미터로 확대된 동전의 일부와 마이크로미터로 확대된 동전을 중첩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자의 형식을 유지하되 확대된 동전 속 인물에 주목하여 그 인물과 관련된 신문 기사 ․ 잡지 등을 한 화면에 결합시킴으로써 인간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지호준이 나노미터와 마이크로미터로 확대한 동전 이미지를 중첩시킨 전자의 작품들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건축물과 풍경이 새겨진 동전들이다. 동전에는 다보탑(多寶塔),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사저(私邸)였던 몬티첼로(Monticello), 콜로라도(Colorado) 산맥 등이 등장한다. 인류 문명을 대표하는 건축물, 광활한 자연이 미니어처(miniature)가 되어 작은 공간에 놓인 상황은 ‘인간보다 거대한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의 시각에서 인간 세계는 어떻게 보일까?’라는 작가의 상상력에서 시작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시각적 경험과 판단의 중심에서 비켜난 상황을 암시한다. 인간을 기준으로 놓았을 경우에는 동전이 미물이지만 동전보다 작은 존재에게 그것은 매우 광대한 것이다. 반대로 인간보다 거대한 존재에게 인간 세상은 동전보다 더 작은 것이다. 현재의 과학적 지식으로 예측 가능한 우주를 기준으로 한다면 인간과 인간이 사는 세계는 나노 입자보다 더 미미할 것이다. 이처럼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인간 세계도 나노 입자가 될 수 있다는 역발상은 지호준이 작업 초기부터 지속해온 인본주의적 사고에 대한 고민과 비판, 미시 세계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미시와 거시의 경계는 무엇이며 우리가 인지하는 이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결코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호준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기준에 따라 매번 다른 무수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암시를 줄 뿐이다.

 

광활한 자연과 거대한 건축물이 축소되고 작은 동전이 확대된 이 낯선 상황은 원근법이 사라진 모호한 공간으로 인해 더욱 강조되고 작품을 마주한 관객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전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150배에서 300배까지 확대된 동전은 긴 시간 동안 인간과 함께한 흔적인 녹(綠), 상처, 오염 등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솜뭉치, 구름을 연상시키는 나노 입자로 이루어진 배경은 딱딱하고 차가운 동전의 금속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촉감은 피부가 어떤 대상과 맞닿았을 때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만 지호준의 동전은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충족된다. 일반적으로 미술은 조형예술, 시각예술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되어 왔으며 전자는 미술의 공간성이, 후자는 미술의 시각성이 강조된 명칭이다. 그 중 시각예술이라는 명칭은 미술이 시각 중심적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상식적으로 통용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미술은 그 태생부터 시각적이었으며 긴 시간 동안 가시 세계의 모방, 원근법을 통한 재현, 시각적 순수성을 지향한 추상 미술을 거치면서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성 중심적 철학에 대한 비판이 감각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과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절대성을 소유했던 시각 대신 촉각과 미각 같은 유물론(materialism)적 감각이 강조되었다. 이는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의 작가들은 시각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각을 제공한다. 지호준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는 작가이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이 다양한 감각을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것과 달리 지호준은 시각을 통해서 공감각(共感覺)을 제공한다. 인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인본주의적 결과물인 과학 기술을 역이용했던 것처럼 시각중심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시각을 역이용하는 이중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다. 한쪽에 두 발을 모두 놓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borderline)을 중심으로 양쪽에 한 발씩 걸쳐놓는 그의 성향은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지호준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촉각성(visual tactility)은 디지털(digital) 기기, 매스 미디어(mass media)가 넘쳐나는 오늘날의 감각 경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말했듯 텔레비전, 영화, 컴퓨터와 같은 매체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어떠한 대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촉각성과 유사한 지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공감각적 경험은 확대 촬영된 지호준의 사진 이미지에서 극대화된다. 그러나 아이러니(irony)하게도 극대화된 촉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지호준의 작업에서 진실된 촉감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만지면 그것은 매끄러운 평면일 뿐이다. 보이는 것과 사실이 다른 이 상황은 ‘인간이 인지하는 모든 것이 과연 진실인가?’라는 그의 질문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한편 지호준은 동전과 신문 기사를 중첩시킨 작품들에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우리 세계의 작은 부분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접점(conjunction)을 찾아낸 후 지호준만의 역사적 내러티브(narrative)를 이끌어낸다. 동전이 그렇듯 신문은 일상적이고 값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흔하고 작은 물건에는 당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과 이슈(issue)들이 담겨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하루의 뉴스가 모여 역사가 구축된다.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작은 대상인 신문은 정치적 이데올로기(ideology)에서부터 가십(gossip)에 이르기까지 복잡다단한 인간사를 보여준다. 작가는 에이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과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 미국의 국장(國章) 독수리와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의 암살,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와 다이애나 비(Diana Spencer),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와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를 각각 짝지어 놓는다. 이들은 서로 혁명의 감동을 나누거나, 우울하고 불편한 감정을 갖거나, 공격하는 관계 속에 놓인다. 시공간, 혹은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함께할 수 없었던 인물들과 사건들의 결합은 무심히 지나쳤던 역사를 바로 오늘의 시각에서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때 동전과 신문 사이의 틈새를 채우는 나노 입자들은 역사 속에서 잊혀진 사람들과 사건들, 유실된 미시사(微視史, microhistory)를 은유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함유하는 새로운 역사 쓰기를 상징한다. 나노 기술(NT)이 물질 세계를 구성하는 분자의 기본 구조를 10억분의 1미터(m)인 나노라는 단위로 파악하는 것처럼 미시사는 종래의 역사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작은 사람들이나 사건들을 역사의 기본 단위로 상정한다. 나노 기술과 미시사는 아주 작게 보기를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고 재창조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세상을 줌-인(zoom-in)해서 보여주는 지호준의 나노 세계는 동일한 목표를 갖는 다른 영역인 나노 과학과 미시사를 연결시키는 접경지대인 동시에 작은 것으로부터의 혁명을 이끌어내는 가능성의 세계이다. 그러나 지호준이 단지 작은 세계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는 지호준이 작업 초기부터 이중적인 태도를 유지해온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작업은 절대성을 갖는 것으로 여겨진 거시 담론에 의해 배재되고 망각된 작은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결합시켜 새로운 전체상(全體像)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세계의 본질을 찾기 위해 작은 것까지 들여다보는 것이다.

 

지호준의 작업은 이제 인간의 역사를 지배해온 철학, 가치관, 이데올로기, 권력에 대한 주제로 확장된다. 그리고 작가의 질문은 ‘역사는 누가 기록하는 것인가?, 인간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는 진실은 있는가?’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뉴스는 의심받지 않으며 절대적 사실 혹은 진실로 여겨졌다. 과거 사람들은 뉴스를 보면서 그것이 거짓이거나 조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진실로 믿었던 사실들이 거짓으로 판명되기도 하고 조작되거나 은폐된 것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동전이 위조될 수 있듯이 뉴스도 위조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란 객관적인 연구 방법에 기초한 과학적인 것이자 완벽한 리얼리티(reality)를 갖는 것이라는 관념은 모더니즘 시기까지 이어져온 정설이었다. 그러나 리얼리티는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며 다양한 문맥(context) 속에서 계속 변한다. 각각의 시대는 자신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쓸 것을 권유한다는 고든 S. 우드(Gorden S. Wood)의 말처럼 변하지 않는 역사의 진실이란 존재할 수 없다. 역사는 그것을 기록하는 주체의 관점과 주체가 놓인 권력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엘리트(elite)적이고 거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갖는다. 또한 역사 기록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매번 달라진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같은 역사 기록일지라도 모든 개인은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그것을 읽게 된다. 즉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와 가치를 갖는 역사는 없다는 말이 된다.

 

역사의 본질과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작가적 고민은 그 스스로 역사를 편집하고 만들어내는 것에 이른다. 지극히 주관적인 지호준의 기준에 의해 선택된 신문 기사들은 실제 간행되었던 그대로가 아니며 작품의 주제나 화면의 시각적 구성과 더 잘 어울리게 교체되고 편집된 것이다. 심지어 신문 전체가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진실로 믿는 뉴스와 역사 모두 저널리스트(journalist)와 역사가 혹은 제 3의 누군가의 관점에서 기록된 세상의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담아내는 것이자 보다 나은 역사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다. 작품 속에서 기사들이 선택, 조작, 창조됨으로써 역사와 담론이 만나고 실제로 있었던 사건과 있었을 법한 사건, 즉 가능성이 만나 교직(交織)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지호준은 이번에도 역사가와 소설가로서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역사가는 명백한 사실만을 다루어야 하는 엄격한 의무를 갖지만 소설가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창작할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위치에서 허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호준은 사실과 허구를 한 화면에 버무려 넣음으로써 기록자와 창조자를 넘나드는 모호함을 유지한다.

 

지호준은 하이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가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정답이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지호준이 과학을 이용해 보여주는 세계는 정답이 없으며 모호하고 흐릿하다. 인간의 감각과 판단, 역사와 진실, 세계의 실재와 본질에 대한 질문들을 끝없이 던지면서도 명확한 길을 제시하지 않아 상대주의(相對主義) 혹은 라프로쉬망(rapprochement)적 태도를 생각나게 한다. 지호준의 작업을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과거와 현재, 사실과 허구, 미시와 거시, 과학과 예술처럼 서로 상반된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무수한 접경지대이다. 그러나 이 작업의 목표가 무질서인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접경지대에서 현미경과 확대경을 함께 들고 작은 세계와 큰 세계를 모두 아우르는 보다 근원적인 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찾는 본질은 현재까지 유지되어온 거대 담론이나 고정관념의 절대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집을 수도 있는 잠재적인 전복성(顚覆性)과 변화를 내포하는 것이다. 지호준은 인간 세계의 한계를 절감(切感)하지만 그것이 가진 가능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 가능성을 위해 여러 세계를 월경(越境)하며 끝없는 넓이와 깊이를 갖는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우리를 그가 만든 접경지대로 초대한다. (끝.)